본문 바로가기

문화여행/역사

[담양역사] 담양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까요? ④조선시대

[담양역사] 담양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까요? ④조선시대

대나무의 고장이며 여행자들의 필수코스로 자리잡은 담양!! 조선시대에 담양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왕의 눈물!! 태조가 통치하던 조선 개국시기엔?

우선 태조 4년(1395) 담양이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고향이라 하여 감무관(監務官)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키는 조치가 취해지고, 1399년 공정왕(정종)비 김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군(郡)에서 부(府)로 승격하였고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쳐졌다.


뿌리깊은 나무의 주인공 세종대왕에게 담양은

세종 17년(1435)에는 창평의 관할이었던 장평(長平)·갑향(甲鄕)의 향·부곡이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의 영역내에 들어와 있다하여 이를 담양에 병합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조선초기의 개편에서는 담양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이는 그 군사적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행정적 편제는 한말까지 대체적으로 큰 변화 없이 유지되나 몇 차례 강등되는 때도 있었으나 곧 복구된다. 강등된 경우는 영조 4년(1728) 역적 미구(美龜)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도호부로 된 일, 영조 38년(1762) 좌수(座首) 이홍범(李弘範) 등이 역적을 도모하였다 하여 강등되었으며, 창평현은 성종 5년(1474) 창평 출신인 강구연(姜九淵)이 현령(縣領) 전순도(全順道)를 능욕하였다 하여 광주로 예속되었다가 성종 9년(1478)에 복구된 일이 있다.

조선의 태평성대 영정조 시절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조선시대 하부조직으로 면리제(面里制)을 들 수 있는데 영조 35년(1759)에 작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정조 13년(1789)에 작성된 『호구총수(戶口總數)』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담양부는 총 15개 면에 5,532호(戶), 18,242구(口)의 규모였고, 창평현은 10개 면에 1,999호(戶), 7,292구(口)였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담양부가 20개면 5,688호(戶), 18,270구(口), 창평현이 10개면 2,041호(戶), 7601구(口)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