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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여행/담양의인물

[담양의 인물]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

[담양의 인물]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정철은 우리에게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져있죠.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은 꼭 한 번씩 배우고 지나가는 문학작품입니다. 이렇게 친숙한 송강 정철이 담양 출신이었다니 더욱 반갑네요. 담양의 인물 송강 정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송강 정철 (松江 鄭澈, 1536∼1592)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계함(季涵)이며,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중종 31년(1536) 서울 장의동(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령부 판관 정유침이며, 어머니는 죽산 안씨이다.

맏누이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후궁 가운데 한 사람인 숙의로 입궐하고, 막내 누이가 왕의 종실인 계림군에게 출가 하면서, 왕실과의 혼인으로 집안이 새로이 활기를 찾으며 펴 나기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도 벼슬이 내려졌다.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 하면서, 왕자들과 어울려 놀며 친교를 쌓았으며, 특히 훗날의 명종인 당시 경원대군과는 소꿉동무 사이로서, 정분이 매우 두터웠다. 

1545 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집안이 사화에 연루되어 자형인 계림군이 역모죄로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맏형은 광 양으로 유배되었으며,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했으며,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에서 풀러났다.

명종 2년 (1547) 전라도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가 집안에 휘몰아쳐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으며, 맏형 은 다시 붙잡혀 와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도중 32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둘째형은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 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라도 순천으로 은거하였으며, 송강은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명종 6년 (1551) 아버지가 사면을 받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담양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이 후 27살의 나이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10년여 동안 이곳에서 송순·임억령·김윤제·김인후·양응정·기대승 등 당대 기라성 같 은 학자·문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였으며, 김성원·고경명 등과 교우하며 성장하였다. 명종 7년(1552) 김윤제의 주선으 로 문화 유씨와 결혼하였으며, 신방은 현 창평면 해곡리 와송당(유종헌가옥)에 차렸다.

명종 16년(1561) 진사시에 서 장원을 차지하였으며, 이전에 우계 성혼, 율곡 이이 등과 교우관계에 있었으며, 명종 17년(1562) 문과 별사에서 장원급제하 였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명종의 사촌형 경양군의 옥사사건을 맡아 처리하면서 명종의 부탁을 거절함 으로써, 수년 동안 좋은 벼슬길에서 소외되었다. 이후 30살 때까지 형조·예조·공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공조·예조의 정랑에 제수 되었다.

명종 21년(1566) 형조정랑, 성균관 직강,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로 임명되었으며, 북관어사로 나아가 함경도를 순시하였으며 그후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홍문관에 들어갔다.

‘죽서루와 오십천’ 정철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죽서루에서 내려다보는 오십천 경관과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죽서루와 절벽부의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선 조 즉위년(1567)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고 직후 율곡과 더불어 호당에 선출되었으며, 선조 2년(1569) 5월에 홍문관 수 찬, 교리, 지평에 제수되고, 교리,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570년 4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37살 (1572) 되던 해 6월까지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묘살이 이후 직강,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 및 사인, 사간원 사 간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6년(1573) 홍문관 전한, 사헌부 집의, 군기시정 등을 역임하였으나 4월에 모친상을 당 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40살(1575) 되던 해 5월까지 약 2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묘살이 이후 내자시정, 사인으 로부터 홍문과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자, 서인 의 주요 인사로서 동인과 대립하다 마침내 율곡에게 조정의 화합을 맡기고 담양 창평으로 낙향하였다(첫 번째 낙향). 

선 조 11년(1578)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고 11월에 사간 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그 즈음에 벌어진 진도 군수 이수의 뇌물사건 옥사 처리 문제로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입고 직무가 바 뀌고, 12월에 성균관 대사성·병조참지에 제수되지만, 이수의 옥사 이후 계속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12년 (1579) 형조참의, 우부승지, 동부승지에 제수되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고, 당쟁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다가 정 치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그 동안 머물러 있던 서울 및 고양군 음죽을 떠나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였다(두 번째 낙향).

선 조 13년(1580) 1월에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이 무렵 「관동별곡」·「훈민가」 등을 지었으며, 관찰 사 임무를 수행하면서 도내 여러 폐단들을 시정·개혁하고, 영월 땅에 표석도 없이 버려진 단종의 묘를 수축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 며, 지방관을 독려하기 위해 「고을의 관리들을 깨우쳐 인도하는 글(諭邑宰文)」을 짓기도 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강원도 내 민풍 을 크게 진작시겼다.

관찰사의 외직에서 돌아와 참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며,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정승 노수신의 사직 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답(신하의 상소에 임금이 내리는 답)을 짓게 되는데, 그 내용이 합당치 않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 과 동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였다(세 번째 낙향). 그러나 특명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특히 도 내 세액과 부역의 실상을 조사·개혁하여 백성들에게 크게 칭송 받았으며, 그 무렵 전라도사로 있던 조헌과 처음 만나 우여곡절 끝 에 돈독한 교분을 쌓게 된다.

선조 15년(1582) 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상서원정, 예문관 직제학, 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선조 16년(1583) 예조참판, 자헌대부 예조판서, 지돈령 부사, 동지 성균관사에 이어 형조판서, 예조판서에 제수된다.

선 조 17년(1584) 더 없는 지기였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고하며 애도의 시를 지었다. 2월에 대사헌 겸 예문제학에 제수되 며, 곧이어 찬집청 당상으로 차출되었으며, 8월에 지의금부사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임금이 총마를 특사하여 출입시에 타 고 다니게 되니, 사람들이 그를 '총마어사'라고 불렀다. 12월에 다시 특명으로 승진하여 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 겸 지경연사에 제수되 었다. 

선조 18년(1585) 판돈령으로 직무가 바뀌었으나 동인들로부터 조정 내부에 파당을 만들어 나라 일을 그르치 려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그들의 공박과 사간원 및 사헌부의 논핵을 입고 마침내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인물들과 함께 벼 슬에서 물러났다. 처음에 고양을 중심으로 한 근기 지방에서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가까이에서 계속 비방의 소리가 들려오 자 결국 창평으로 낙향하였다(네 번째 낙향). 이후 54살(1589) 되던 해 10월초까지 4년여 동안 향리 창평을 근거지로 초야 에 묻혀 지냈으며, 이 기간에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선조 22년 (1588) 맏아들 기명의 죽음으로 복을 입었으며, 정여립 모반사건이 적발되자, 아들의 장사를 위해 경기 고양에 올라와 있다가 대 궐에 들어가 임금께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계를 올렸다. 이어 기축옥사가 벌어지며, 11월에 특명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겸하 여 옥사를 주관하는 위관이 되었다. 

선조 23년(1590)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위관을 맡아 기축옥사를 처리하면서 희생을 줄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7월에 수충익모 광국추충 분의협책 평난공신을 책하고 인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선 조 24년(1591)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다 이산해의 모해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사직서를 올리자 체임되었다. 윤 3월에 이르 러 평소 주색에 빠져 생활이 문란하고, 당을 꾸며 경박한 무리를 모았으며, 조정의 인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혐의로 사헌부와 사간 원 양사의 논핵을 입고 파직되었다. 6월에 다시 양사가 계를 올려 송강의 귀양을 청하자, 처음에는 명천으로 정배되었다가, 곧이 어 진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만에 북녘 당 강계로 유배되어, 거처 주위에 가시울타리까지 쳐지는 혹독한 귀양살이를 하였으 며, 이 기간 중 대부분을 독서와 사색으로 보냈다.

선조 25년(1592) 4월 중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월초에 유배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임금을 모시고, 9월에 충청·호남 양호의 체찰사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선 조 26년(1593) 1월에 체찰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모함을 받고 북쪽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5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 었으며, 11월, 귀국 직후 명나라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할 뜻이 없는 것이 송강의 일행으로부터 나온 거짓 보고 때문이라는 엉뚱 한 무함을 입었다. 이에 사면을 청하고 강화 송정촌으로 물러났으나, 당장 생계조차 꾸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깊은 시름을 안 고 지내다가, 마침내 12월 18일 강화 송정촌 거처에서 세상을 더났다.

세상을 뜬 이듬해인 1594년 2월에 경기 도 고양군 신원에 장사하고, 1624년(인조 2)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1665년(효종 6)에 우암 송시열에 의해 충북 진천으 로 이장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문청(文淸)'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1691년(숙종 17)에 다시 관직이 삭탈 되었다 가, 1694년(숙종 20)에 재차 회복되었다.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한 식영정. 정철이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 머물던 정자로, 성산별곡의 창작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딱딱한 역사적인 사실은 정철이 어떤 사람인지 와닿지가 않죠?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은 정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송강(정철의 호)이 반쯤 취해서 즐겁게 손뼉을 마주치며 이야기 나눌 때 바라보면 마치 하늘나라 사람인 듯 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치 풍류를 잘 알아 천상세계에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전하고 있죠.

정철은 사설시조의 작가로도 이름을 떨쳤지만 정치에서도 한치의 타협도 없는 정치적 자세를 취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선조 8년경을 전후로 해서 붕당이 형성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했으면 “당시 조정에 동인과 서인의 당파가 있었는데 정철은 동인이 가장 기피하고 싫어하는 인물”이었다고 평했다고 하는군요.

대나무처럼 곧은 정치적 자세와 풍류를 즐기며 시조를 짓는 문학성까지 갖춘 정철이야말로 담양의 기상을 가장 제대로 이어받은 인물이 아닐까요?